01프롤로그 : 티잉 그라운드 위의 갑, 페널티 구역의 을
새벽 5시 반, 수도권 명문 회원제 골프장의 주차장에 들어서면 이상하리만치 긴장된 표정으로 운전석에서 내리는 사내들이 있다. 아직 차가운 산 공기가 도는데도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사내, 트렁크에서 최신형 캐디백을 꺼내며 연신 스마트폰 시계를 확인하는 사내. 그들은 오늘 잔디를 밟으러 온 자유로운 골퍼가 아니다.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연간 납품 계약서를 입에 물고 필드라는 전장에 자진 입대한 대한민국 '을(乙)'들의 서글픈 초상이다.
티오프 1시간 전부터 클럽하우스 로비에 도착해 '갑(甲)'의 동선을 체크하고, 그가 좋아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미리 세팅해 놓는 것은 접대 골프의 아주 기초적인 서막에 불과하다. 약속된 시간이 되면 뱃살을 두둑하게 늘어뜨린 대기업 구매 팀장이나 원청업체 이사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온다. 을의 얼굴에는 순간 상업용 미소가 타이트하게 걸리고, 굽신거리는 허리와 함께 연신 "이사님,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라는 영혼 없는 관용구가 튀어나온다.
대한민국 필드 위에서 벌어지는 비즈니스 라운딩은 스포츠의 탈을 쓴 철저한 계급극이다. 대형 브랜드의 협찬을 받아 가며 '신사들의 스포츠'니 '성공한 리더들의 네트워크'니 하며 미화하기 바쁜 기성 골프 매체들은 이 추악한 연극의 실체를 절대 조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십 년간 잔디밥을 먹으며 온갖 인간 군상의 밑바닥을 목격해 온 나 정우진 프로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오늘 이 글은 녹색 그린 위에서 벌어지는 가장 비열하고 서글픈 관행, 바로 '접대 골프'의 찌질한 갑을관계에 대한 신랄한 폭로전이다.
023분 만에 찾아내는 신기한 공 : 덤불 속 '알까기'의 서글픈 연출
접대 골프에서 '을'에게 요구되는 종목별 스킬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은 단연 '공 찾기 기술'이다. 갑이 쥔 드라이버 헤드 상단에 맞은 공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른쪽 산악 숲속 깊은 곳으로 처박히는 순간, 을의 운명도 함께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갑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장갑을 고쳐 매며 카트 좌석에 털썩 앉지만, 을은 가방에서 클럽 세 개를 한꺼번에 들고 무릎까지 오는 뱀딸기 넝쿨 속으로 미친 듯이 돌진한다. 규칙상 구질구질하게 볼을 찾는 시간은 3분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을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분 남짓이다. 그 시간 안에 갑의 볼을 찾아내지 못하면 오늘의 계약 논의는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갑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절벽 아래로 공을 날려 보냈을 때가 제일 피가 말립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주머니에 갑이 쓰는 볼과 똑같은 브랜드, 똑같은 번호의 새 공을 두 개씩 넣고 다닙니다. 뱀 굴 같은 풀숲에 들어가서 슬쩍 발밑에 떨어뜨린 뒤 '이사님! 여기 찾았습니다! 라이도 아주 좋습니다!'라고 외치는 게 제 생존 전략입니다.중소 부품 제조업체 영업이사 A씨 (52세)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슬픈 자작극인가. 자신의 돈을 들여 사 온 명품 골프공을 숲속에 몰래 버려가면서까지 갑의 자존심을 세워주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비즈니스 골퍼들의 눈물겨운 현주소다. 볼을 찾아낸 을이 구슬땀을 흘리며 뛰어오면, 갑은 마치 자신이 친 공이 엄청난 비거리와 운으로 살아남은 양 허세를 부리며 2타째 아이언 스윙을 날린다.
접대 라운딩 현장에서 정우진 프로가 수집한 '을의 필사적인 3대 프로토콜'은 다음과 같다.
- 갑의 드라이버샷이 쪼르(탑볼)를 타고 50미터만 굴러가도, 1초의 망설임 없이 "와, 런이 엄청납니다! 페어웨이 한가운데입니다!"라고 고함을 지른다.
- 갑이 보기나 더블보기를 했을 때 은근슬쩍 캐디의 스코어카드에 '파(Par)'로 적히도록 캐디피 팁을 건네며 은밀한 야합을 시도한다.
- 자신의 스코어는 절대로 갑보다 좋아서는 안 된다. 퍼팅 그린 위에서 갑보다 타수가 적을 것 같으면, 1미터짜리 버디 찬스에서도 일부러 라이를 턱없이 잘못 본 척 터무니없는 형편없는 샷을 날려 타수를 맞춘다.
03그늘집 계산서 앞의 연극과 2차로 이어지는 비굴한 뒤풀이
전반 9홀이 끝나고 그늘집에 들어서면 접대 골프의 두 번째 클라이맥스가 기다리고 있다. 시중가보다 4~5배는 비싸게 책정된 12만 원짜리 흑돼지 수육과 5만 원짜리 막걸리 세트가 테이블 위에 올라온다.
갑은 그늘집에 들어서자마자 "허허, 오늘 내가 사려고 했는데 말이야"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멘트를 던지며 젓가락을 집어든다. 하지만 결제 시간이 다가오면 갑은 지갑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느긋하게 이쑤시개로 이 사이를 쑤시고 있다. 을은 후반 티오프 신호가 떨어지기도 전에 카운터로 달려가 자신의 개인 신용카드를 내밀며 수십만 원의 폭리 금액을 군소리 없이 결제한다.
어디 그뿐인가. 내기 골프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은밀한 돈 거래는 그야말로 합법을 가장한 뇌물 수수 현장이다. 홀당 1만 원, 2만 원씩 걸고 치는 스트로크 게임에서 을은 언제나 돈을 잃어주는 자판기 역할을 자처한다. 3미터 퍼트가 홀컵 근처로 가기만 해도 "아이구 이사님, OK(컨시드)입니다!"라며 소리를 지르고, 정작 자신이 50센티미터 쇼트 퍼트를 남겨두었을 때는 오들오들 떨며 스스로 홀아웃을 못 하고 자멸하는 쇼를 선보인다.
18홀이 모두 끝나고 락커룸에서 샤워를 마친 뒤에도 을의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클럽하우스를 나와 인근의 고급 한정식집이나 장어구이 집으로 이동해 저녁 식사와 양주를 대접하고, 대리운전 기사까지 골프장 주차장으로 불러 갑의 차에 실어 보낸 뒤에야 비로소 을의 길고 길었던 하루가 마무리된다. 18홀 라운딩비, 그늘집 비용, 캐디 피, 내기 골프 잃어준 돈, 저녁 식대까지 포함해 하루에 단 한 명의 갑을 위해 사비와 회사 공금 수백만 원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04에디터의 한마디 : 스포츠를 구걸로 만드는 자들에게 던지는 경고
골프는 자연과 자기 자신, 그리고 스코어카드라는 정직한 기록과의 외로운 싸움이다. 타수를 속이지 않고, 페널티 구역에 들어간 공은 겸허히 1벌타를 먹고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하며, 그린 위에서 동반자의 스코어를 존중하는 것이 이 운동이 100년 넘게 유지해 온 품격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접대 골프 현장에는 공정한 스포츠도, 신사적인 매너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우월한 위치를 이용해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밟고 공짜 골프와 접대를 즐기는 악질적인 갑의 탐욕, 그리고 계약 한 건을 따내기 위해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숲속을 헤매는 을의 비굴함만이 엉켜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청업체 직원들의 피 같은 돈으로 그린피를 해결하며 "오늘 내가 스윙 궤도가 아주 좋아"라고 착각에 빠져 있는 불쌍한 사장님들과 구매 팀장들에게 한마디 던진다. 동반자가 당신 스윙에 지어주는 그 감탄과 찬사는 당신의 골프 실력에 보내는 환호가 아니다. 당신이 가진 그 보잘것없는 권력의 유효기간에 바치는 가장 가식적인 구걸의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주머니에 가짜 공을 넣고 덤불 속으로 구르는 이 땅의 서글픈 을들에게도 권한다. 당장 그 찌질하고 비굴한 연극의 장갑을 벗어 던져라. 정당한 제품의 기술력과 서비스로 승부하지 못하고, 라운딩 18홀 동안 공이나 찾아주며 구걸하듯 따내는 계약이라면, 언젠가 더 비굴하게 굴어대는 또 다른 을에게 빼앗길 사상누각에 불과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