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프롤로그 : 티잉 그라운드의 정적을 깨는 요란한 벨소리

새벽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산속 골프장의 1번 홀 티잉 그라운드. 동반자가 드라이버를 빼 들고 연습 스윙을 마친 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척추 각을 유지하며 백스윙 톱을 향해 느릿하게 클럽을 올려 베어내는 신성한 순간이다. 공기를 가르는 정밀한 템포가 임팩트를 향해 나아가는 바로 그 0.1초의 찰나, 카트 도로 쪽 혹은 동반자의 뒷주머니에서 익숙하고 찢어질 듯한 아이폰 기본 벨소리가 숲 전체를 사정없이 붕괴시킨다.

"아 어, 김 이사! 어 어 나 지금 필드야. 응? 그 계약서 건? 아 내가 아까 말했잖아, 3억 5천 아래로는 도장 찍지 말라고!"

깜짝 놀란 스윙어는 상체 축이 무너지며 공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짓밟아 버린다. 공은 페어웨이 50미터 앞 뱀샷으로 기어가고,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린다. 하지만 범인은 사과는커녕, 한 손으로 클럽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귀에 전화기를 밀착시키고 목핏대를 세우며 카트 도로를 활보한다. 자신이 마치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국가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거물이라도 된 양,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비즈니스 용어를 쏟아내면서 말이다.

대한민국 골프장에서 매 주말마다 반복되는 환장할 노릇의 풍경이다. 그린피와 카트비, 캐디피를 합쳐 하루 40만 원에 육박하는 거금을 내고 나와서, 18홀 내내 전화기를 귀에 붙이고 사는 일명 '업무 통화 빌런'들의 생태계다.

대형 골프 의류 브랜드의 협찬을 받고 골프장 협회와 끈끈한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기성 골프 매체들은 이 추악한 매너 불감증에 대해 절대로 쓴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바쁜 현대인의 스타일리시한 필드 비즈니스'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 주기 바쁘다.

하지만 가식과 위선을 사정없이 격파하는 Club14의 정우진 프로는 이 꼴불견 관행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오늘 이 글은 필드 위에서 '바쁜 척, 중요한 사람인 척'하며 동반자의 멘탈을 사정없이 파괴하는 사내들의 비겁한 자의식과 찌질한 허세 심리학을 통렬하게 저격하는 칼럼이다.

02"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는 기이한 자의식

도대체 왜 사내들은 잔디를 밟으러 나와서까지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일까? 이들의 심리 기저를 한 껍질만 까보면, 아주 서글프고 결핍된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필드에 나와서 놀고 있어도 세상이 나를 끊임없이 찾을 만큼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동반자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조급증이다.

진짜로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거나 조직의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한 리더들은 자신이 4~5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회사가 휘청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만약 임원이 4시간 동안 전화 연결이 안 되었다고 망할 회사라면, 그 회사는 이미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샷을 하러 이동하는 내내 카카오톡 업무방의 알림을 확인하고, 해외 주식 창이나 코인 시세 그래프를 들여다보며,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는 사내들의 속내에는 깊은 불안감이 깔려 있다. 자신의 부재가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 대한 공포, 그리고 동반자들에게 자신이 가벼운 놀량패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회적 승리자'로 보이고 싶어 하는 허영심 말이다.

이들은 카트 뒷자리에 앉아서도 쉴 새 없이 전화기를 두드린다. 전반 홀이 끝나고 그늘집에서 막걸리와 두부김치를 먹는 순간에도 "아, 그래? 그거 결재 올려놔"라며 목소리 톤을 한 자치 더 높인다. 정작 본인의 타수는 이미 100타를 뛰어넘어 개판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머릿속은 온통 '바쁜 사장님 코스프레'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03숲속에서 에어팟을 끼고 공을 찾는 기이한 인류

이들의 무지와 무매너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바로 페어웨이를 벗어나 슬라이스가 난 공을 찾으러 숲으로 들어갈 때다.

한 손에는 7번 아이언과 웨지를 들고, 귀에는 에어팟 프로를 꽂은 채 숲속 경사면을 기어오르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사내의 모습은 흡사 기말고사를 앞두고 외톨이가 된 고등학생의 기이한 중얼거림을 연상케 한다.

슬라이스가 나서 깊은 러프나 산속으로 들어간 손님이 계셨는데,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면서 발로 잔디를 대충 툭툭 차시더라고요. 공을 찾아달라고 소리는 지르시는데, 전 통화 내용이 다 들리니까요. 그냥 친구분이랑 저녁에 어디서 술 마실지 메뉴 고르는 통화였습니다. 경기 진행은 밀리고 뒤 팀은 바짝 붙어 오는데, 정말 클럽을 빼앗아 버리고 싶었습니다.
수도권 A 회원제 골프장 8년 차 익명 경기보조원(캐디)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들의 통화 내용 중 90% 이상이 결코 '지금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긴급 사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이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한 재확인, 친구와의 쓸데없는 안부 전화, 혹은 하청업체 직원을 향한 의미 없는 갑질성 지시사항에 불과하다.

이들은 동반자들의 소중한 주말 시간과 거금의 그린피, 그리고 골프라는 스포츠가 요구하는 엄격한 예의와 집중력을 완전히 짓밟고 있다. 본인의 허세 하나를 채우기 위해 4명으로 구성된 한 조 전체의 템포를 사정없이 흩트려 놓는 것이다.

필드 위 업무 통화 빌런들이 주로 대는 구질구질한 핑계는 대략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 "내가 지금 수십억 원짜리 인수합병(M&A) 도장 찍기 직전이라 전화를 안 받을 수가 없어." (정작 통화 내용은 매장 인테리어 견적 싸움)
  • "아이고 미안해, 본사 회장님이 갑자기 전화를 주셔가지고..." (화면을 슬쩍 보면 그냥 '김 부장'으로 찍혀 있음)
  • "주식이 지금 변동성이 심해서 실시간으로 대응해야 해." (계좌 잔고를 보면 몇십만 원 단타 치는 중)
  • "아, 이 친구가 자꾸 급하다고 전화를 하네? 끊으라고 해도 안 끊어!" (자신이 먼저 전화를 걸어서 10분째 수다 떠는 중)

04진짜 리치와 싱글 골퍼들은 휴대전화를 카트에 가둔다

필자가 수십 년간 수많은 필드를 누비며 마주한 진짜 고수들, 그리고 진정한 사회적 부와 명예를 축적한 리얼 리치들의 공통점은 극도로 명확하다. 그들은 클럽하우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스타트 광장으로 나오는 순간, 자신의 스마트폰을 '무음' 모드로 전환하고 카트 깊숙한 보관함에 가둬버린다.

그들에게 골프장은 일상의 잡다한 소음과 세속적 번뇌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거룩한 도피처이자, 오롯이 자신의 신체 반응과 동반자와의 깊은 교감에 몰입하는 성소(聖所)이기 때문이다.

진짜 바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일수록 자신의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완벽하게 통제한다. 내가 골프를 치는 4시간 동안은 감히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 없도록 사전에 차단막을 쳐놓는 것이 진짜 '클래스'다. 전화기에 노예처럼 끌려다니며 동반자들의 눈치를 보고,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허둥지둥 호주머니를 뒤지는 사내의 모습에서 과연 어떤 품격과 재력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못하는 골퍼는 결코 한 자릿수 스코어(Single Digit)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 골프는 뇌의 섬세한 정숙함과 감각의 온전한 집중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18홀 내내 뇌의 한쪽 구석을 회사 업무와 주식 시세, 전화 통화에 열어둔 채 스윙을 하니, 샷이 얇게 맞고 그린 위에서 3퍼트, 4퍼트를 남발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필귀정이다.

05에디터의 한마디 : 전화기를 꺼두는 것이 가장 하이엔드한 매너다

수백만 원짜리 최신형 프리미엄 드라이버를 휘두르고, 이탈리아산 최고급 가죽 골프화를 신었다 한들 무엇하겠는가. 동반자가 티샷을 준비하는 순간에 귀에 에어팟을 꽂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업무 통화를 일삼는다면, 당신은 그저 잔디밭을 더럽히는 '돈 많은 오랑캐'에 불과하다.

진짜 하이엔드 골퍼가 되고 싶다면, 오는 주말 라운딩부터 당신의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을 카트 뒤주 속에 과감히 던져버려라.

4시간 동안 세상과 단절될 수 있는 용기,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무 일 없듯 아주 잘 돌아간다는 겸손함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비거리 250미터 드라이버 샷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세련된 진짜 어른의 품격이다.

18번 홀 그린을 빠져나와 장갑을 벗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고 온전히 동반자의 굿샷에 환호하며 자신의 라인에 몰입했던 당신의 당당한 모습. 동반자들이 라커룸으로 들어가며 "오늘 정말 매너 좋고 편안한 라운딩이었다"며 건네는 담백한 악어야말로, Club14가 추구하는 가장 가치 있는 '필드 위 최고의 찬사'일 테니까.

#EDIT #골프에티켓#골프풍자#필드매너
정프로
정프로 · 레슨 프로 · club14 편집장
정우진 프로. club14 편집장 겸 LAB Secret Note 연재.